Dilettante/Book

에리히 프롬의 자유에의 도피

포긴 2012. 3. 28. 16:09

에리히 프롬의 자유에의 도피를 읽다보면 이 책의 한구절을 인용한 부분이 나온다..
자메이카의 바람이라는..
이부분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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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때 에밀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아이는 갑자기 자기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왜 그런 일이 5년 전에 일어나지 않았는지, 혹은 5년 후에 일어나지 않았는지 생각해봐도 그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런 일이 어째서 그 날 오후에 일어났는지에 이르러서는 전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이는 윈치의 뒤쪽,뱃머리의 오른쪽 구석에서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 윈치에는 문을 두드려 방문을 알리는 소도구로 악마의 손톱처럼 생긴 것을 걸어 놓고 있었다). 이윽고 아이는 그런 소꿉장난에도 싫증이 나서 고물 쪽으로 정처도 없이 막연히 꿀벌과 아름다운 여왕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걸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나는 나다'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 떠올랐다. 아이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서서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의 몸 전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이는 웃옷 앞을 고개를 숙여 가깝게, 또 그개를 들어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시험삼아 쳐들어 올려 본 양 손을 바라본 것 말고는 많은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것이라고 갑자기 깨달은 조그마한 몸을 대강 그려보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이는 비웃기 시작했다. '아, 그렇구나' 하고 아이는 이 점에 대해서 생각했다. '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무나. 이렇게 걸어다니거나 붙잡히거나 하고 있는 거야. 너는 잠시 동안도 그런 것들로부터 빠져나갈 수는 없어. 그리고 너는 처음에는 어린아이로 있다가 자라나서 어른이 되고 늙은이가 되어서야 간신히 이런 미치광이 같은 장난은 안해도 되는 거라구.'



이처럼 매우 중요한 사건에 어떤 방해도 받지 않기 위해서 아이는 돛대 위에 있는, 자기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려고 줄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팔이나 발을 하나하나 움직여 보았는데, 손발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지는 걸 보고 새로운 놀라움과 감동을 받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물론 여태까지도 손발은 그와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인 줄은 몰랐다. 높다란 자리에 가서 앉은 아이는 매우 조심스럽게 양 손의 살갗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왜냐 하면 그것도 아이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웃옷의 목 언저리를 조금 흘러내리게 해서 어깨를 드러내 보았다. 그리로 들여다보고 옷 밑에도 그녀의 몸이 쭉 이어져 있는 걸 확인하고는 뺨에 닿을 때까지 어깨를 움츠려 보았다. 얼굴과 따스한 어깨의 움쏙 꺼진 부분이 마주닿자 기분 좋은 전율을 느꼈다. 마치 사이좋은 친구와의 포옹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느낌이 도대체 뺨쪽에서 오는 것인지,어깨쪽에서 오는 것인지, 어느쪽이 포옹하는 쪽이고 어느 쪽이 포옹당하는 쪽인지 아이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아이는 자신이 에밀리 바스 도온튼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그 의미를 신중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왜 '이제야 비로소'라는 말을 덧붙였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왜냐 하면 아이는 자신이 다른 인간이었다는 식의 윤회(輪廻)와도 같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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